밝아온 여명黎明, 에 나는 사죄를 읊었나. 2022. 1. 3. 00:04

 

 

 

 

idealism - phosphenes (1).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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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뭇 날씨를 달리한 계절 바람이 서늘하게 다가온다. 시간은 부지런히 달려 어느덧 환절기에 접어들었음에도 시계는 아직 여름, 그 초엽에 멈추어 있었다. 차게 가라앉은 공기에도 팔뚝 소매는 여전히 짧았다. 어둠은 오늘따라 더 극성이다. 저물어가는 햇빛이 베란다를 비출 때는 언제고 벌써 짙은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밤이었다.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눈에 짧은 점멸을 반복해댄다. 어깻죽지 너머 불 꺼진 방은 아직도 칠흑의 공간이었다. 어둠은 두려움이었고, 그것이 무섭게 다가올 때면 그는 따스한 온기를 찾고는 했었지. 그 온기가 되어주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던 적이 있었다. 텅 비어버린 가슴에 온기를 품었던 적이 있었을 무렵의 일이다. 부패한 가슴을 가리고자 덮은 얇은 옷자락이 희미한 달빛 아래 유독 초라했다.

익숙하게 찾아든 불을 담배에 붙인다. 달큰한 목소리는 없어진지 오래, 긴 담뱃대가 타들어감에 제 수명도 타들어간다고 자위하며 쓴 속을 달랜다. 흰 숨이 적막이 가라앉은 하늘을 수놓는다.

삶은 미련이다. 아직도 책상 한 켠에는 치우지 못한 미련이 변모하여 재털이를 가득 채웠다. 여태껏 살아온 것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테다. 새로 꺼내든 미련도 결국은 재털이에 쑤셔박힌 채 차츰 부패를 거듭하겠지.

 

영원을 약속했던 잡은 손의 공백에 부패하는 시간, 밤이었다.

 

 
궁상맞은 변명이나 하나 둘 꺼내놓는다. 새벽은 모든 것을 발가벗겨 놓았다. 수치심에 변명이란 옷을 입는 시간. 이제와서 후회를 해본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명백히 잘못은 그가 아닌 나에게 있었다. 커져만 가는 부피를 감당하지 못한 것. 늘어가는 흔적을 감당하기 버거워진 것. 전부 틀린 말은 하나 없었다만, 애써 변명을 하자면 그의 곁에 있다가는 이대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허나 사실은 누구 보다도 곁에 남고 싶었던 마음이 큰지라 애써 한 변명이 궁색해진 참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스물 일곱 해를 반복하며 하늘의 점멸을 몇 번이나 바라보았는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의 시간 동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이제와서는 등을 타고흐르는 죄악감을 인지했으나 무엇이 죄악인지, 어째서 죄악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어느 성경에도 나와있지 않았다. 죄악인지, 아닌지조차.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지금, 과거에 저지른 죄악으로 인한 대가를 받고 있다고.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게 용서를 구해본다. 짧은 조소, 어차피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면서. 벌써 반이나 타들어간 담배에 입맛이 씁쓸하다. 그래, 그러고는 했다. 언제나 그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도 어차피 존재하지 않는 신인데. 알면서도 용서를 구했다. 혹여 용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저만의 성경을 쓰겠노라고. 태초에 빛이 있었다가 아닌, 나는 무엇보다도 고결한 신에게 한 송이 장미를 헌화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성경이다. 문구를 읊고, 기도하는 신앙자 또한 혼자밖에 없는. 베란다는 좋은 기도실임과 동시에 고해성사를 하기에도 좋은 공간이었다. 이 시간을 틈타 네게 고해성사를 한다. 앞으로 읊을 수많은 용서의 문구 중에 하나가 될 진부한 고해이자 자백이다.

 

사랑했다. 두 손 단단히 맞잡고 있었음은. 먼저 건네어진 손이었다. 항상, 그는 나보다 한 발 앞서 있었던 기억 투성이다. 몸은 훌쩍 커 앞서가고, 마음은 아직 어려 저만치 뒤에서 좇기에도 바빴지. 결국 먼저 손을 놓은 것 또한, 그토록 나약한 아이의 치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평생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 받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나의 신이 이 옹졸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마음이다. 깊은 곳 감춰둔 마음이 하나 둘 쌓여가서, 어느덧 네게서 받은 사랑을 둘 자리조차 사라진 다음에야 비집고 드는 불안을 껴안았다. 변함없이 받는 사랑이고, 사랑을 주는데도 한없이 불안해져만 갔다. 이대로 온 사랑을 다하고 산화해버릴 것만 같아서.

꽁초에 가까워진 담배처럼, 산화하는 생명도. 개피를 태울 때마다 천천히 차가워지는 손끝도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할 것만 같았다. 무릇 버릇이란 쉽게 뗄 수 없는 것처럼, 어느덧 죽음도 일상이 되어버린 거겠지. 그래서, 나의 장미. 나의 신. 네게 헌화를 하는 그 손끝에도 진득한 죽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을 테다.

 

손에서 마음이 흘러넘쳤다. 그렇게 하나 둘, 놓쳐가다가. 비겁하게 도망쳤다. 더 사랑을 받기 위해 게워낸 치기 어린 마음의 끝이 나의 순수로 향할까봐. 선망과 질투는 한끗 차이인 것처럼. 영원히 선망의 대상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와서야 나는 후회한다. 처절하게 후회한다. 더욱 치밀하게 감추고, 감추어서. 네 곁에 남을걸, 하고 후회해버리고 만다.

후회에 절어, 불씨가 이렇게나 가까이 타들어갔을 줄은. 문득 손 끝에서 아릿하게 번져오는 화기에 그만 물었던 담배를 놓친다. 추락한다.

 

추락을 거듭하는 한밤중이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방 너머, 흐릿한 사물의 형체를 잡아낸다. 아릿하게 통증이 번져오는 손 끝을 치료할 생각보다, 이 미련을 어떻게든 치워버리고 싶은 강박에 사로잡혀 아프지도 않은지 곧바로 몸을 숙여 꽁초를 주워든다. 적막이 짙게 가라앉은 방을 손으로 헤집어 재털이처럼 보이는 것에 무작정 비벼댄다. 강박에 휩싸인 일말의 행위가 끝나고, 밭은 숨을 내쉰다. 한 것도 없는데 숨이 차올랐다. 마른세수를 하는데, 와닿는 살이 짓무른 느낌이 들고서야 그제야 짧은 소성 터뜨린다.

 

실로 미쳐버린 것일까. 무엇 하나 단단히 빠져버린 것은 틀림 없었는데. 이 공백이 네 부재라고 쉬이 인정할 수가 없었음은, 그 손을 먼저 놓아버린 사람이 누구도 아닌 자신임이 그 연유였다. 무슨 자격으로 청승맞게 미련이나 떨고 앉았는지. 서랍장을 뒤져 아무런 연고 하나 꺼내어 우악스럽게 짜내어 펴바른다. 제대로 된 것이 하나 없었다.

 

서늘한 바람이 찾아들어 옆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결 따라 고개 돌리자, 어슴푸레한 새벽빛과 도시 불빛이 어지러이 산란한다. 빛 알갱이들이 베란다를 넘어 방 안으로 찾아든다. 방도 어느새 파아랗게 물이 든다. 그 음울한 빛이 싫어 암막커튼을 친다. 창을 닫아낸다. 모든 것으로부터 홀로 떨어져 스스로를 단절시킨다.

 

맞잡은 손과 함께라면 시궁창이라도 기꺼이 걸을 수 있다 믿었는데 인정할 때가 왔다. 네가 없는 이곳이 바로 시궁창이자 나락이었다. 나의 유일한 사랑이자 세계.

 

지독하게도 파랗게, 후회에 절은 어슴푸레한 새벽이다.

 

 
적막한 어둠 속에서 얼마나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분명 하루도 지나지 않았음에 틀림 없는데 이상하리만치 시간 감각이 없다. 잠시 빛을 못 보았을 뿐인데도 아침이 밝았는지, 저 커튼 너머 밝은 빛이 들었는지. 아니면 일주일, 계절이 지났는지. 문득 저 커튼을 열어보기 두려웠다.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어둠과 함께 있는데도, 저 환한 빛으로 나갔는데도 여전히 음울에 절어 있을까봐. 그 사실 하나가 두려워서 스스로 어둠에 갇혀 있는 것을 택한다. 머저리 같은 시간이다.

 

붉은 빛을 내며 빛을 발하는 전자 시계에 적힌 시간을 보니 자정이다. 이미 밤을 지새웠는데 벌써 하루가 지난 것일까, 하고 그 붉은 빛을 계속 바라만 보고 있자니. 고장난 것일까, 그 전자 시계는 계속 12시인 채로 멈추어 있다. 세계가 손에서 바스라지듯 사라진 시간이다. 그가 없는 환절기에 머무른 계절은 여름이었다.

 

눈은 완연하게 어둠에 익었다. 이제는 졸음마저 쏟아지려 하는데, 저 커튼 너머의 계절도 때 모르는 여름으로 돌아와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 작은 기대에 어둠뿐인 커튼으로 자꾸만 눈길이 쏠린다. 곁을 스치고 지나가던 서늘한 바람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몸을 감싸안는 따스한 느낌이 조금 익숙한 것이라. 혹여 계절이, 제 세계가 돌아온 것일까 하고는 우악스럽게 몸 일으켜 커튼을 젖힌다.

 

 

 

밝은 빛이 쏟아졌다.

 

해가 뜨고 있었다.

 

여명이 밝았다.

 

 
 
눈이 부신 나머지 두 눈두덩이를 손으로 가려본다. 자연스럽게 밑으로 향한 시선, 높은 경치에 문득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리고 흔들리는 몸에 일순 세계가 반전된다.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른다. 눈을 뜨니 그토록 보고 싶은 얼굴이 앞에 있어서. 무의식중에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제서야 깨닫는다. 밤 사이 헤매이던 곳이 몽중이었음을.

귓가에 스미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없었던 때에 홀로 새벽을 지새우고. 스스로를 가둔 암막 커튼을 걷어내고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에 침대에 네가 누워있지는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고, 그 하얀 손 다시 한 번 잡아보는 상상에 시간을 보냈던 날이 있었음을 생각한다.

 

이전 같았으면 눈도 뜨지 않고 침대에서 늑장을 피웠을 일이다.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 네 낯꽃을 바라보니 변함없이 웃고 있었다. 다시 찾아온 계절에 황폐한 세계가 생동한다. 맥박이 빨라지고, 아직 살아있음을 체감한다. 비록 음울한 푸른빛 죽음이 손 끝에 붙어있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다시 눈 감고서 품에 고개 묻는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잠투정이다. 허리를 감싼 손이 방금까지 잠을 잔 사람 답잖게 차다. 꿈도 환절기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 추워요.

 

억지로라도 좋으니, 이 세계에는 나 홀로 들어찼으면 좋겠다고. 밤사이 짧은 기도를 올린 채로 어깻죽지 너머 창을 바라본다. 암막커튼은 단정하니 걷어올려져 밝은 햇살이 방에 들었다. 이 세계를 잃지 않았으면 했다. 잃고 싶지 않았다.

싸늘하게 식은 몸을 감싼 곱게 핀 장미 같은 얼굴에, 전하지 못할 용서를 거듭 구했다.

 

용서에도 여명이 밝아올 때면, 두 선분이 교차하여 손 끝에 눌어붙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부질 없는 기대를 하고서. 밝아온 여명에 사죄를 읊었다.